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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역사

백령도에는 선사 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진촌 지구에 있는 말동패총과, 용기포 지구에 있는 용기패총 등에서 빗살무늬 토기와 무문토기, 타제 및 마제 석부, 연석봉, 기타 골편(骨片)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의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 신석기 시대 말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이 시대부터 백령도에 사람이 거주하여 역사가 이루어졌다. 당시의 주민은 어로에 종사하는 한편 초기 원시 농경 생활을 하였으리라 추측된다.

백령도는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였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려 할 때에는 고구려의 군사가 이 곳에서 신라의 군사와 싸워 물리친 일도 있다.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신라 영토가 되어 한주(漢洲) 장구진(長口鎭)에 딸려 있었다.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고려 영토가 되어 해주(海州)에 속하게되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 강령현(綱領縣) 조에 의하면, 백령도는 고구려 때에는 '곡도(鵠島)'라고 하였고, 고려 때에는 '백령진(白翎鎭)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 세종 10년에 영강(永康)과 백령을 통합하여 강령진(綱領鎭)이 되고, 뒤에 강령현이 되었다고 한다.

백령도는 조선 세종 때에는 해주목사(海州牧師)가 관할하였다 . 조선 중기에는 황해우도(黃海右道)에 소속되어 옹진에 설치된 병마절도사령에 귀속되 었다. 그래서 옹진에서 백령도에 행수군첨절제사(行水軍僉節制使)를 파견하였다. 조선 말엽 전국이 23부로 구성될 때 해주부에 속해 있다가, 13도가 설치되고 나서 일제 말까지는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으로 내려왔다. 백령도와 관련된 문헌 기록으로는 맨 먼저 『삼국유사』「진성여왕(眞聖女王) · 거타지(居陀知)」조의 기록을 들 수 있다.


신라 진성여왕 때의 아찬 양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후백제의 해적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잘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하였다. 배가 곡도(鵠島)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10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양패는 이것을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서 점을 치게 하니, 섬에 있는 신지(神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래서 못 위에 제물을 차려 놓으니, 못의 물이 한 길이 넘게 치솟았다. 그 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에 남겨 두면 순풍을 얻을 것이라 하였다. 양패가 잠에서 깨어 그 일을 좌우에게 말하고, "누구를 남겨 두는 것이 좋겠소?" 하고 물으니, 여러 사람이 말했다. "나무 조각 50개에 각각 저희들의 이름을 써서 물에 가라앉는 것을 보고 제비를 뽑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패는 그 말대로 하였다. 군사 거타지의 이름이 물에 잠기었으므로, 그 사람을 남겨 두니 문득 순풍이 불어서 배는 거침없이 잘 나갔다. 거타지는 조심스럽게 섬 위에 서 있었다. 갑자기 노인 하나가 못 속에서 나오더니 거타지에게 말했다. "나는 서해약(西海若, 서해 바다의 신)이오. 늘 해가 뜰 때면 중하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타라니의 주문을 외면서 이 못을 세 번 도는데, 그렇게 하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 위에 뜨게 되오. 그러면 중은 내 자손들의 간을 빼 먹곤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내일 아침에 그 중이 반드시 또 올 것이니 그대는 그 중을 활로 쏘아 주시오."

이 말을 들은 거타지가 말했다. 활 쏘는 일은 나의 장기(長技)입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거타지는 숨어서 기다렸다. 그 이튿날 동쪽에서 해가 뜨자 과연 중이 오더니, 전과 같이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어 먹으려 하였다. 이 때 거타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은 이내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치사하며 말했다. "공의 은덕으로 내 생명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기를 바라오."

이 말을 들은 거타가 말했다. "따님을 저에게 주시고 저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 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지를 모시고 사신의 배를 따라 호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신라의 배를 두 마리의 용이 호위하고 오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황제에게 고했다. 황제는 신라의 사신이 필경 비상한 사람일 것이라고 하고,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거타지는 꽃가지를 내어 여자로 변하게하여 함께 살았다.

이 말을 들은 거타가 말했다. "따님을 저에게 주시고 저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 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지를 모시고 사신의 배를 따라 호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신라의 배를 두 마리의 용이 호위하고 오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황제에게 고했다. 황제는 신라의 사신이 필경 비상한 사람일 것이라고 하고,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거타지는 꽃가지를 내어 여자로 변하게하여 함께 살았다.

이 이야기에서 당나라에 가는 신라 사신 양패(良貝) 일행은 '곡도(鵠島)' 즉 백령도에 이르렀을 때 풍랑이 크게 일어 가지 못하고 10여 일을 묵는다. 양패가 꿈에 나타난 노인의 말대로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섬에 남겨 두자 문득 순풍이 일어 황해를 계속한다. 이 서해신은 중으로 변신하여 자기의 가족을 잡아먹는 늙은 여우를 물리치기 위해 양패가 데리고 가는 군사 중 활을 잘 쏘는 거타지를 원했던 것이다. 서해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되었던 양패는 활 솜씨를 발휘하여 늙은 여우를 물리쳐 서해신을 도와준다. 도움을 받은 서해신은 자기를 도와준 양패에게 딸을 아내로 주어 은혜에 보답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백령도는 신라 때에 중국과 왕래하는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사신양패는 백령도에서 서해신에게 거타지를 제물로 바치고 순풍을 얻어 항해를 계속하였다. 이것은 백령도 지역에는 오래 전에 항해의 안전을 위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습속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 준다. 백령도에는 「거타지설화」 외에도 「용난 개울」, 「용이 올라간 참샛골」,「두 용이 싸운 용기포」,「용의 승천과 용신제」 등 용에 관련된 전설이 많이 있다. 황패강 교수는 학술조사를 위해 백령도에 다녀간 뒤에 쓴 기행문에서 "거타지 이야기에서 꽃으로 변하는 용녀는 「심청전」에서 연꽃으로 변하는 심청과 흡사하다."고 밝힌 바 있다. 거타지 설화와 「심청전」은 지리적 배경이 같고, 내용상으로 공통 되는 점도 있어 서로 관련이 깊다고 생각된다.

고려의 대호문호인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고려 고종 7 (1220)년 이세화가 백령진장이 되었는데 청렴하고 공평하게 고을을 다스렸다. 고을에는 옛날부터 향교가 없었는데 이세화가 처음으로 향교를 창건하고 아전들의 자제를 모아 글을 가르쳤다. 이들이 몇 해 안 가서 모두 인재가 되어 과거에 응시한 자까지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온 고을이 그를 사모하였으며 여러 번 글을 올려서 그의 아름다운 행동을 포장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백령도에 유교를 전해 준 사람과 시기를 말해 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백령도와 관련된 기록이 몇 군데 보인다. 이를 종합해 보면 백령도는 국방과 관련되는 군사적 요충지였으나 땅이 협착하여 진장을 포기한 적도 있다고 한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을 보면, 고려 태조 때에는 대광(大匡) 유검필을 이 곳으로 유배 하였다가 불러들였다고 하며, 회종 때에는 최충헌이 그의 생질 박진재를 이 곳으로 귀양 보내어 죽게 하였다고 한다. 고종 때에는 김중구(金仲龜)와 추밀부사(樞密部使) 김경손을 백령도로 귀양보냈 다가 죽였으며, 충렬왕 때에는 김흔과 이분희를 백령도에 유배시켰다고 한다. 이로 보아 고려 때에는 백령도가 유배지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백령도가 유배지로 이용될 정도로 교통이 나쁘며, 모반할 수 없는 악조건을 갖춘 곳이었음을 말해 준다.

조선 시대의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에는 왜구를 포함한 외부의 적들이 백령도를 침범한 일, 이에 대한 백령도의 대응 방식, 그리고 지리적 조건 등이 적혀 있다. 여기서도 백령도는 군사적으로 요충지이지 취약 지역이며 척박한 곳이라 하였다. 백령도는 조선 시대에도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조선 광해군 8(1616)년에 정인서가 백령도에 유배되었다. 광해군 12(1620)년에는 문신 이대기(李大期)가 정인홍 사건에 연루 되어 백령도에 유배되었는데, 그는 유배되어 있는 동안 당시의 백령도 풍물을 기록한 『백령도지(白翎島誌)』를 남겼다. 이 문집에는 백령도의 지리적 특징과 지형, 산업, 국방, 풍속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는 백령도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갑오경장 직후에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잡으려고 상소하던 사람들이 백령도로 귀양왔다. 그 중 공주 사람 김성진은 중화동에 사는 허득(許得)에게 성서를 전하고, 함께 힘을 합하여 중화동 교회를 세웠다.

백령도의 행정 조직은 조선 시대에는 군사 조직과 겹치도록 하였다. 그래서 섬의 최고 수장(首長)인 첨사는 이 섬의 사령관 격인 행수군첨절제사로 삼품 당상관인 문무 겸직의 전제관이었다. 섬을 다스리기 위해 행정구역을 진내면(현재 진촌리 일대), 북면(북포리와 연화리 일대), 남면(남포리 일대)으로 나누고 각각 풍헌 내지 향장을 두었다. 이것이 최말단 조직이 되어 행정을 보좌하였다.

첨사는 병조에 속한 벼슬로, 왜적과 해적으로부터 섬을 방어할 책임을 부여받았다. 첨사는 절충장군을 비롯한 이방·호방·병방으로 두어 섬을 통치하였다. 첨사는 죄인을 먼저 참하고 뒤에 보고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 첨사가 집무하던 진촌에는 섬을 방어하기 위해 토성을 축성했던 흔적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또 첨사 밑에 필요한 관원을 현지에서 뽑아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역대 첨사 중에는 주민의 재물을 빼앗고 횡포를 일삼던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에서도 선정을 베푼 첨사도 있었다고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전하는 선정비는 모두 여섯인데,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두 진촌리 남산의 반공유격전적비가 있는 곳으로 옮겨 놓았다

고종 31(1894)년 갑오경장 때 진(鎭) 제도가 도장(島長) 제도로 바뀌면서 백령도는 장연군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도장에게 군사권은 주지 않고, 행정·사법권만 주어 섬을 다스리게 하였다. 191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면장을 두게 되었다. 면장은 행정만을 수행하고, 순사 주재소가 설치되어 경찰 행정 책임을 수행하게 되어 행정·사법의 양권이 분리되었다.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지자, 장연군에 속하였던 백령도는 옹진군 백령면 으로 남한에 속하게 되었다. 6·25 사변 후에 생긴 휴전선으로 옹진반도에 있는 옹진군의 대부분이 북한의 지배에 들게 됨에 따라 백령도·대청도·소청도를 포함한 백령면은 경기도 옹진군게 속하게 되었다. 그 후 197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백령면에 속했던 대청도와 소청도가 대청면으로 승격 ·분리되었다. 그래서 백령도 1개 섬이 옹진군 백령면이 되어 내려오다가 1996년 3월 1일자로인천광역시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